평화이야기

장사리 학도병, 22개국 참전용사 교류로 평화를 그리다

사랑이있는 나무 2023. 5. 11. 21:58

장사리 학도병, 22개국 참전용사 교류로 평화를 그리다

 




“총알을 피하다 동아줄을 놓쳐 파도에 휩쓸려 가기에 ‘이제는 죽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파도가 육지로 밀어줘 간신히 육지로 쓸려 들어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장사리 전투에 참여했던 류병추 한국전참전연합국친선협회 회장의 회고이다.

올해는 6.25 전쟁 정전 70주년이다.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2021년 기준 세계 경제 10위라는 괄목한 성장을 이뤘다. 전쟁으로 국토와 인력이 넝마가 돼버린 상황에서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데엔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빛나는 청춘을 바친 대가였다. 가족과 조국을 지킨 참전용사와 16개국의 UN 연합군이 꽃 한 번 피우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많은 이들. 정전 70주년을 기념하며 여전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었다. 

류 회장은 1932년생, 만으로 91세다. 장사리 전투가 벌어졌던 1950년 9월 15~19일 당시 나이는 불과 만 18세였다.

학도병 입대 전 당시 상황을 묻자 류 회장은 “고향이 대구라 전쟁이 터지고 좀 있어서야 전쟁 상황을 접하게 됐다”며 “고향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는데 급하게 군인을 모집한다는 모병 소식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류 회장은 “당시 증조모님과 부모님, 동생 셋이 함께 살고 있었고 자신이 맏아들인데 전쟁에 지원하겠다고 하면 허락을 하지 않으실 것 같아 가족에게는 말을 하지 않고 군에 지원해 입대하게 됐다”고 밝혔다.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된 동기를 묻자 류 회장은 “과수원에 모병하는 사람이 와서 나이도 어리고 학생이니 후방 근무를 하라며 지원을 권면했으나, 이왕 군인으로 지원했으면 나라를 위해 후방 근무보다는 적진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최일선으로 가겠다고 지원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게 입대한 류 회장과 다른 어린 소년들 100여명은 대구역 앞 집결지에서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후 저녁에 트럭을 타고 밀양 농장으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약 보름을 지내며 도강 훈련, 산악 훈련, 총 쏘는 훈련 등을 받았다.

류 회장은 “처음에는 군복도 없이 사복을 입었고, 나중에 군복을 배급해 줬으나 온전한 군복은 아니었다”면서 “식사는 배급을 해줬지만, 수저도 없이 음식만 나눠 줬으며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열악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보름간 훈련받고, 이틀의 육군본부 훈련까지 마친 류 회장이 처음 투입됐던 전투는 장사리 전투, 장사상륙작전이었다. 장사리 전투를 배경으로 2019년에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영화의 제목처럼 대중들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전투였으나, 직후 벌어져 전쟁의 판도를 바꿨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꼭 필요했던 전투 중 하나로 전해지며 다수의 대중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류 회장과 학도병들은 오후 3시 무렵 건빵 3봉지와 실탄을 받고 ‘문산호’라 이름 붙혀진 LST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목표는 영덕군 장사리. 그러나 학도병의 첫 임무는 시작부터 고난에 부딪혔다.

류 회장은 “바다 한 가운데 내려서 육지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고 1개 중대가 육지를     향해 먼저 올라갔다. 강한 비바람과 파도 속에 바다로 뛰어내린 학도병들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바다에 빠져 죽어갔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류 회장은 배에 있는 선원들이 육지로 던진 동아줄을 잡고 육지를 향해 헤엄을 쳤다. 하지만 직후 북한군이 학도병들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총알을 피하다가 동아줄을 놓친 류 회장. 파도에 휩쓸려 가며 그는 “이제 죽는가 보다” 생각했다. 천만다행으로 파도는 류 회장을 육지로 밀어줬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류 회장은 “육지에 도착한 기쁨도 잠시, 빗발치는 인민군들의 총알을 피하려고 모래를 파서 몸을 숨기며 물에 젖은 총을 매만지고 적을 향해 총을 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해변엔 총에 맞은 전우들의 비명과 함께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만세라는 소리도 들려왔다는 게 류 회장의 설명이다.

잠시 공격이 줄어든 사이, 학도병들은 육지로 올라갔다. 그렇게 오전 4~5시까지 혈투가 이어졌고, 200고지에 다다른 이들은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끔찍했던 밤이 지나갔다.

어려웠던 상륙에 보급은 처참했다. 류 회장은 “양식이 없어 마을에 가서 음식을 얻으려 했지만 전쟁통에 마을에도 먹을 건 없어 묶여 있던 소를 잡아 요기했다”며 “나중에 후송선인 미 해군 비행기가 음식을 떨어뜨려 줘서 음식을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투는 계속됐고, 학도병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추가 고지를 점령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열세에 사흘째 학도병들은 후퇴하게 됐다. 후퇴 역시 배로 이뤄졌다.

학도병의 후퇴를 확인한 북한군은 모래사장으로 사격했고, 유엔군이 반격하면서 해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미군이 출항을 결정하면서 일부 학도병은 장사리에 남겨졌다.

류 회장은 “우리를 태우려고 배 한 척이 도착해 120분 안에 타야했다”며 “고무보트로 한 열 명씩 이동하다가 시간이 지연됨에 따라 한 5~60명은 못 타고 적의 포로가 됐다”고 전했다.

상당수 포로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면서 후퇴하는 북한군에 이끌려가다가 고된 행군으로 지친 밤을 틈타 탈출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더러는 폭격으로 숨진 이도 있었다. 현재 장사리 전투에서 숨지거나 실종된 이의 추정치는 139명이다. 그러나 명확하지 않고, 이 139명조차 유해는 아무도 발견되지 않았다.

구조선에 탑승한 류 회장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류 회장은 일선에 재배치됐다. 병으로 아파 죽는 전우를 보면서도 계속 행군하다가 부대가 해체되는 일을 보기도 했고, 2사단에 배치돼 포천 전투에서 부대가 전멸하는 모습도 봤다. 이른바 철의 삼각지구(철원·김화 등) 중 하나인 금화지구에서 전투하다 포탄에 다치는 일도 있었다.

이후에도 양양 15사단에서 근무하던 중 병을 얻어 또 병원 신세를 졌고, 그곳에서 휴전 소식을 접했다. 군의관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빨리 제대시켜준 덕분에 1953년 4월 22일부로 류 회장은 제대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 3년여만의 일이었다.

정전된 현재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마음에 대해 류 회장은 “대한민국이 전쟁이라는 큰 위기를 이겨내고 지금의 잘 사는 나라로 발전된 것은 운세가 좋다고 생각된다”며 “지금의 발전된 한국의 모습을 보면 그 전쟁에 나갔던 일이 참으로 잘한 일 같다”고 되돌아봤다.

다만 류 회장은 “남한의 국론도 통일을 못 하고 이념전쟁을 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전쟁을 마무리했다면 정치적으로 합심해 이 나라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이념이 분리돼 자기 생각이 옳다고만 하며 하나로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연합국 소속으로 참전한 나라는 22개국. 총 195만 7733명의 연합군이 6.25 전쟁에서 한국을 도왔다. 

한국전 참전 연합국 친선협회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당시 연합군으로 참여한 22개국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오는 7월 22일 보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먼저 6월 2일 22개국 대사들을 초청해 행사를 열 계획이다. 

류 회장은 “우리나라는 전쟁의 고통을 이기고 부강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이에 피로써 우리나라를 도와준 해외 나라의 전우들을 잊지 말고 그들에게 보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됐다”며 “내가 살아있을 때 고마웠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이번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배경을 소개했다.

“앞으로는 평화 무드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25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전우로서 당신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에 밥 한 끼라도 하고 싶었다는 마음을 전하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전해 줄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마음이 전해지면 이 지구촌이 하나가 돼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틀이 될 것 같습니다.”

출처]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6476